Discover문 목사의 직설/直說요한복음_18 ·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 당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아는가
요한복음_18 ·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 당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아는가

요한복음_18 ·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 당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아는가

Update: 2025-11-04
Share

Description

·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 당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아는가
· 요.4,27~42
· 유튜브로 시청할 것을 권합니다. 자막이 있습니다.
---
· 몇몇 분의 헌금으로 이 영상을 내보냅니다. 축복하며 기도하겠습니다.
· 헌금: 농협 060-02-192192 · 문경◯
--
· 하나님에 대한 간절함이 승화하면
· 하나님께서 우리 아버지이시라는 사실 인식에 대하여
---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요한복음 4장 27-42절 분석
핵심 요약
본 문서는 요한복음 4장 27-42절을 중심으로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에 대한 신학적 통찰을 종합적으로 정리한다. 핵심은 인간의 생명을 유지하는 것이 육체적 양식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θέλημα, 델레마)을 행하고 그분의 일을 이루는 영적 양식이라는 것이다.
문서는 사마리아 여인의 변화를 통해 이 주제를 구체적으로 탐구한다. 여인은 자신의 본래 목적인 '물을 긷는 행위'를 버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증언하는 새로운 사명을 받아들인다. 이는 육체적 필요(ἐπιθυμία, 에피뒤미아)가 하나님의 근본적인 원함(θέλημα, 델레마)으로 승화되는 과정을 상징한다.
또한, 형식화되고 타락한 종교 시스템에 대한 강력한 비판을 담고 있다. 당시 유대교의 제사 중심주의와 오늘날의 '교회주의'를 동일선상에 놓고, 신앙의 대상이 하나님이 아닌 조직이나 집합체가 되는 우상숭배적 행태를 지적한다. 참된 예배는 영(πνεῦμα, 프뉴마)과 사실(ἀλήθεια, 알레데이아)로 드리는 것이며, 거짓이 섞일 수 없음을 강조한다.
마지막으로, 영생(永生)은 미래의 사건이 아니라 '지금 여기서' 하나님의 아버지를 앎으로써 이루어지는 현재적 사건임을 역설한다. 이 구원의 메시지가 유대인의 경계를 넘어 사마리아인에게 전파되는 과정을 통해, 예수는 특정 민족을 넘어선 '세상의 구주(σωτήρ, 소테르)'임이 선포된다.
1. 참된 예배의 본질: 제사주의와 교회주의 비판
본문은 참된 예배의 의미를 재정의하며 시작한다. 예배를 의미하는 원어 '프로스퀴네오(προσκυνέω)'는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 즉 진실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찾는 행위 그 자체이다.
타락한 제사 제도: 당시 성전 중심의 제사는 종교 세력(산헤드린)이 하나님을 가리고 자신들의 탐욕을 채우는 수단으로 변질되었다. 이는 진실함이 결여된 제사였다.
예수의 제사 폐지: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의 목숨을 버림으로써 제사 제도를 폐지했다. 이는 요한복음 2장 19절의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는 말씀으로 선포되었다.
현대 교회의 문제점 (교회주의):
일부 목회자들이 담임목사직을 세습하는 행위는 하나님을 핑계로 대대로 이익을 취하려는 탐욕(ἐπιθυμία, 에피뒤미아)의 발현으로, 타락한 제사장들과 다를 바 없다.
예배당을 '성전'이라 칭하고 '일천 번제' 등을 언급하며 예배를 구약의 제사로 되돌리려는 시도는 자신들의 이익을 위한 것이다.
신앙의 대상이 하나님이 아닌 '교회'라는 집합체가 되는 '교회주의(全體主義)'가 만연해 있다. 이는 교회를 뒷배경으로 삼아 상식에서 벗어난 행동을 하는 문제로 이어진다.
참된 예배의 조건: 예수께서 제시한 참된 예배는 '영(πνεῦμα, 프뉴마)과 사실(ἀλήθεια, 알레데이아)로' 드리는 것이다. 사실은 거짓과 함께할 수 없으므로, 거짓이 섞인 예배는 참된 예배가 아니다.
2. 제자들의 침묵과 사마리아 여인의 변화
예수와 사마리아 여인의 대화가 끝날 무렵 제자들이 돌아오면서 새로운 국면이 전개된다.
제자들의 놀라움과 침묵:
제자들은 예수가 사마리아인, 그것도 여자와 대화하는 모습을 보고 기이하게(ἐθαύμαζον, 에다우마존) 여겼다. 이는 유대인의 금기를 깨는 파격적인 행위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무도 예수께 질문하지 않았는데(οὐδεὶς μέντοι εἶπεν, 우데이스 멘토이 에이펜), 이는 궁금함을 압도하는 경외심 때문이었다. 신앙이란 '이해를 앞설 만한 경외에 따른 신뢰'의 문제임을 보여준다.
사마리아 여인의 극적인 변화:
여인은 물을 길으러 왔던 본래의 목적을 잊고 물동이를 버려둔 채 마을로 달려갔다. 이는 예수와의 대화가 그녀에게 얼마나 큰 충격과 깨달음을 주었는지를 보여준다.
과거의 삶으로 인해 위축되었던 모습과 달리, 확신에 차고 당당한 태도로 사람들에게 "내가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을 와서 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μήτι οὗτός ἐστιν ὁ χριστός)"고 증언했다.
여인의 확신에 찬 증언은 마을 사람들이 그녀의 말에 귀를 기울이게 만드는 결정적인 요인이 되었다.
3. 두 가지 양식: 육체의 양식과 영적 양식
제자들은 먹을 것을 구해 와 예수께 드렸지만, 예수는 이를 통해 더 근본적인 차원의 양식을 설명한다.
물리적 양식의 한계:
우물물과 제자들이 가져온 음식은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필수적이지만, 이는 고통을 줄이기 위한 임시방편책(臨時方便策)에 불과하다. 아무리 좋은 것을 먹어도 결국 죽음에 이른다.
이는 삶에 대한 근본적인 처방이 될 수 없다.
예수의 참된 양식:
예수는 제자들에게 "내게는 너희가 알지 못하는 먹을 양식이 있느니라"고 말씀하셨다. 여기서 '양식(βρῶσις, 브로시스)'은 '먹는 행위'에 초점을 맞춘 단어다.
이후 34절에서 예수는 "나의 양식(βρῶμα, 브로마)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고 밝힌다. 여기서 '양식(βρῶμα)'은 생명을 유지시키는 실체로서의 음식을 의미한다.
결론적으로, 인간을 진정으로 살게 하는 것은 물리적 음식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θέλημα, 델레마) 그 자체이다.
4. 삶의 동력: 에피뒤미아(ἐπιθυμία)와 델레마(θέλημα)
인간의 삶은 '원하는 것'에 의해 움직인다. 본문은 이 '원함'을 두 가지 차원으로 구분하여 설명한다.
구분 | 에피뒤미아 (ἐπιθυμία) | 델레마 (θέλημα)
의미 | 육체가 원하는 것 | 본질(나)이 원하는 것
번역 | 소욕, 욕망 | 뜻, 원함
특징 | 태어날 때부터 먼저 발동하여 삶의 동력이 됨 | 하늘로부터 온 근본적인 원함.
결과 | 육체의 죽음과 함께 모든 성취가 허사로 돌아감 | 하나님과 조우(遭遇)하게 하며 신성(神性)을 발동시킴.
승화의 과정: 인간은 육체의 욕망(에피뒤미아)을 삶의 동력으로 삼지만, 이는 죽음 앞에서 무의미해진다. 신앙의 여정은 자신의 내면에 있는 근본적인 원함, 즉 '델레마(θέλημα)'를 인식하고 그것으로 하나님의 '델레마'를 이루는 것이다.
인간의 신격화(神格化): 이 과정을 통해 인간은 '신의 존재'로 승화한다.
창세기 1장 26절에서 하나님(ֱאֹלִהים, 엘로힘 - 복수형)이 "우리가 사람을 만들자"고 하신 것은 신의 복수적 개념을 암시한다.
요한복음 10장 34-35절(시편 82편 6절 인용)에서 "내가 너희를 신(θεός, 데오스/ֱאֹלִהים, 엘로힘)이라 하였노라"는 구절은, 인간이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신격체(神格體)로 나아갈 수 있음을 의미한다.
인간은 본래 하나님 '안'에 있는 존재이며, 하나님을 외부의 대상(객체)으로 인식하면서 모든 문제가 발생했다.
5. 현재적 구원과 복음의 확장
구원과 영생은 먼 미래의 일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에 일어나는 현실적 사건이다.
현재적 종말론: 예수께서는 추수의 비유를 통해 "심는 것이 거두는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이는 영원의 세계에서는 시간 개념이 사라지며, 구원이 지금 여기서 일어나는 현재적 사건임을 보여준다. 지금 구원을 이루지 못하면 사후에도 이룰 수 없다.
삶의 유일한 의미: 이 삶이 의미 있는 유일한 이유는 '이 삶에서 하나님 아버지를 알았다는 사실'이며, 이것이 곧 영생을 깨닫는 것이다.
복음의 확장 (랄리아에서 로고스로):
39절에서 여인의 '말(λόγος, 로고스)'을 통해 많은 사마리아인이 예수를 믿었다. 저자 요한이 '로고스'라는 단어를 사용한 것은, 그녀의 증언에 신적인 권위와 하나님의 뜻(델레마)이 담겨 있었음을 의미한다.
42절에서 마을 사람들은 "이제 우리가 믿는 것은 네 말(λαλιά, 랄리아)로 인함이 아니니"라고 말한다. '랄리아'는 일상적인 대화를 의미한다.
종합하면, 마을 사람들은 여인의 일상적인 말(랄리아) 속에서 신적인 말씀(로고스)을 발견했고, 이후 예수를 직접 만나 그 '로고스'를 확증하게 된 것이다.
세상의 구주, 소테르(σωτήρ): 이 사건은 구원이 유대인의 경계를 넘어 이방인인 사마리아인에게 일어났음을 보여준다. 이를 통해 요한은 예수가 유대인만의 메시아가 아니라 '참으로 세상의 구주'임을 선포한다.
---
· https://youtube.com/@moon.moksha
Comments 
In Channel
loading
00:00
00:00
x

0.5x

0.8x

1.0x

1.25x

1.5x

2.0x

3.0x

Sleep Timer

Off

End of Episode

5 Minutes

10 Minutes

15 Minutes

30 Minutes

45 Minutes

60 Minutes

120 Minutes

요한복음_18 ·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 당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아는가

요한복음_18 ·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 당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아는가